게시일: 2012. 8. 24 오전 3:17:58
(출처: 부산대 자게-토론방)
<; 아리스토텔레스 ,아고라와 정치적 우정의 공간>;
일찍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우정론>;에서 우정을 여러 관계망 속에서 설명하였다. 물론 우정은 단순히 공공영역에서의 우정만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또한 그가 말하는 우정은 사적 영역의 규범적 모델을 벗어나 있다. 따라서 그의 우정론은 공공영역과 사적 영역을 포괄한다.
아리스텔레스가 말하는 우정이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설명하였고, 그 관계는 개인적/공공 영역을 포함한다.
그의 우정론은 친구들로 구성된 친밀한 동아리(inner circle)를 포괄하면서도 공공영역을 포괄한다. 이러한 우정은 사적, 공적 영역에서 자발성 ․토론 ․대화 ․공동의 심의 ․설득 ․협력하는 특징을 가지면 이런 특징은 시민들의 공적 활동과 유사한 측면(analogia publicae)을 지니고 있다.
개인적인 영역의 우정으로 친밀한 동아리(inner circle)를 예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친밀한 동아리와 같은 우정이 자발적 토론/대화와 공동(동아리 내 구성원) 심의/설득/협력의 행위를 나타내면 이는 공적 활동과 유사(analogia publicae)하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정의보다 중요하게 취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우정의 유형으로서 친구간의 애정, 남편과 부인간의 사랑(부부애),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시민간의 사랑(동지애), 인간 일반에 대한 사랑 등을 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의 유형으로서 친구간의 애정 (우애), 남편관 부인간의 사랑 (부부애),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시민간의 사랑(동지애)를 또한 포함한다.
이런 포괄적 우정의 의미 중에서 우정의 정치적 의미는 타인과 재화를 공유함으로써 사적 이익에 대한 애착을 줄이는 데 있다. 우정은 모든 인간공동체의 기초이다. 우정은 이익, 덕, 쾌락의 동기로 형성된다. 그런데 가장 완벽한 의미의 우정은 덕에 기초한 선한 인간의 우정이다. 정의로운 것들 중 가장 정의로운 것은 우정과 연관된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폴리스 시민간의 우정은 훌륭한 입법가들이 배양시키려고 노력하는 미덕이다. 왜냐하면 우정 없이 정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우정은 인간 공동체의 기초로 간주한다. 우정의 동기는 이익, 덕 그리고 쾌락이며, 그 중 덕에 기초한 우정이 가장 완벽한 의미의 우정으로 이해한다. 또한 그는 우정의 기초로 이해하였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폴리스 시민간의 우정은 훌륭한 입법가들이 배양시키려고 노력하는 미덕이다. 왜냐하면 우정없이 정의란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아렌트의 우정 개념은 정치적 잠재성을 띠고 있다. 정치적 우정(philia politike)의 형태로 정의되는 우정은 개인에 대한 존중을 특징으로 하는 차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차별화를 시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본적으로 우정을 동질적인 사람들간의 유대로 생각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기본 개념을 수용했으나 우정이 친구들의 동질성 또는 유사성이 기초한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우정은 친구들의 차이 또는 이질성에 대한 인식, 합당한 존중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부정하기보다 그것을 순수한 정치적 형태로 발전시켰다. 우정은 이제 친구들 사이의 차이, 다양성, 이질성과 양립할 수 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아렌트의 우정의 개념은 정치적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이 개념은 정치적 우정(philia politike)의 형태로서 개인에 대한 존중을 특징으로 한다.
아렌트는 다음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차별성을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사람들간의 동질감에 기초한 유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아렌트는 우정이 구성원 간의 생각의 차이에 대한 인식과 합당한 존중에 기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아렌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의 의미를 순수 정치적 개념을 발전 시킨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우정 개념은 정치적 함의를 가진다. 우정의 본질은 대화에 있다.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서만 시민들은 결합된다. 대화에서 우정의 정치적 중요성은 명백히 드러난다. 친구들 사이에 나누는 대화는 그들의 공동 관심사에 속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친구들은 관심사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견해를 달리하겠다는 무언의 합의를 수용하는 개방성을 필요로 한다. 의견의 불일치가 집단 또는 동아리의 붕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치적 우정의 장점은 동료들 사이에 집단적 정체성 또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있다. 우정은 공동의 세계를 구성하는 정치를 구현한다. 끊임없는 상호 경쟁의 삶 속에서 공동 세계를 구성하는 정치는 이해할 수 있는 목적이다. 끊임없는 대화와 논쟁을 통해 차이를 부각시키면서도 유대를 형성하는 행위에서 우정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아렌트의 우정은 기본 수단이 대화이며, 이를 통해 우정의 개념은 정치적 합의를 가진다. 개인/공공 영역에서 우정은 공동 관심사에 대한 대화로 형성될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견해의 수용하는 개방성을 요구한다. 이 때 의견의 불일치가 우정의 붕괴를 의미하진 않는다. 정치적 우정은 상호경쟁의 삶속 속에서 공동 세계를 구성하는 정치를 이해 가능하게 하며, 또한 이러한 정치를 구현한다. 즉, 정치적 우정은 구성원 간 집단-정체성/공동체 형성를 시킨다. 정치적 우정에 있어, 지속적인 대화와 논쟁을 통한 차이의 부각과 이해를 통한 유대를 형성하는 것은 올바른 우정의 형성을 위해 중요하다.
이런 우정 개념은 공동체의 정치와 깊이 관련된다. 종종 혹자들은 권력이 정부에만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부에 있는 권력은 위임된 제도적 권력이며, 그 중심은 분명히 공동으로 활동하는 시민들에게 있다. 우리는 한나 아렌트를 통해서 그 해답의 일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해와 적용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아렌트는 ‘정치적인 것’을 지배와 동일시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폭력의 사용과 전적으로 대립되는 우정(또는 유대)관계를 정치적인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 베버는 갈등을, 그리고 아렌트는 우정을 정치의 본질로 이해하고 있다. 아렌트는 막스 베버를 통해서 드러난 정치적 현실주의를 비판하고 권력과 폭력을 독특하게 정의하고 있다.
공동체로 부터 위임된 제도적인 권력인 정부의 중심은 공동으로 활동하는 시민들이다. 또한 이들 시민을 국가/시 단위의 구성원으로 볼 때, 한나 아렌트의 정치적 우정 개념을 정부 구성의 중심개념으로 확장할 수 있다. 다만 아렌트는 지배를 위한 권력행사를 의미하는 '정치적인 것'과 전적으로 대립하는 우정(또는 유대)을 '정치'로 고려한다. 이는 베버가 갈등을 정치의 본질로 이해하는 것과 반대이다. 갈등에 기반한 정치는 권력과 폭력을 독특하게 정의하고 있으며, 아렌트는 이러한 정치적 현실주의를 비판한다.
관련하여 우리는 법률적 체제들과 정치적 조직과 연결된 구속들보다 더불어 살기의 윤리적 권력을 지배보다 상위에 둘 필요가 있다. 막스 베버는 <;경제와 사회>;의 도입부에서 사회학의 주요한 개념들을 정리하면서,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을 구분하는 지배관계를 통해 모든 제도들 가운데 정치적 제도를 명시했다. 그런데 이런 지배 관계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공동의 권력이다. 우리가 역사적 공동체- 국민, 민족,지방-에서 더불어 살기를 원할 때, 공동의 권력에 대한 관심과 관련된 정치적 우정, 유대성의 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랑과 우정이 개인적 차원의 인간관계에서 발현되는 감정으로 이해하는 경햐이 있지만 이전에 언급한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적 유대를 우정(friendship; philia[아리스토텔레스], amicitia[키케로]로 표현됨)의 한 형태로 표현했다. 우리는 공동체 내에서 사랑이라는 단순한 감정 또는 정서가 아니라 합리적 판단에 따른 유대를 통해 정치적 우정 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우정은 친밀성의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적 유대에 근거한 우정이다.
아렌트의 관점에선, 제도적/정치적 조직 관련 구속들(지배) 보다 공공의 삶의 질의 향상을 우선 시 하여야 한다. 막스 베버는 <경제와 사회>의 도입부에서, 지배라는 행위를 통해 정치적 제도를 명시했다. 민주주의 하 정부의 지배?는 공동의 위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배 관계 보다 근원적인 것이 공동의 권력 이다. 그러므로 우선 공공의 구성원은 권력으로서 작용되는 지배의 방향성이 공동의 권력의 지향점과 잘 일치 하는지 주시해야 한다. 또한 공동의 권력이 올바른 방향의 공공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기 위해선 합리적인 정치적 우정이 구성원간에 형성 되어야 하며, 이는 앞서 언급한 지속적인 대화/논쟁을 통한 상호간의 이해로서 유지 가능하다.
공공의 구성원간에는 직접적인 인간관계으로 연관되기 보단 공동 권력의 지향점에 근거한 유대감을 통한 우정이 형성되므로, 유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때문에 우정에 있어서 유대감은 중요하다. 유대(紐帶; solidarity)란 정치적 개념이며, 행위를 인도할 수 있는 원리이다. 사람들은 유대에 입각해 심사숙고하게, 사실상 냉정하게 피억압자와 피착취자에 대한 괸심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공동의 관심은 인간의 위엄성이나 존엄성이다. 유대는 이성을 공유하고 동시에 일반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 계급 ・ 민족 ・ 인민이란 다수뿐만 아니라 인류를 개념적으로 포괄한다. 유대는 고통으로 촉진되더라도 고통에 의해 인도되지 않고 약자나 빈자들 못지않게 부자들과 강자들을 포괄한다. 유대의 정치적 원리는 감정으로 이해되는 모든 형태의 사랑과 대립된다. 사랑은 정치적 우정(philia politike)으로서의 유대 개념과 대조된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무정치적(apolitical)일 뿐만 아니라 반정치적(antipolitical)이다.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은 사적이고 무세계적이다. 즉, 연인들은 “세계가 마치 자신들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낭만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사랑과 연계된다. 친밀한 사랑은 형제애와 동정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친밀성(intimacy)은 필연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공영역을 파괴하기 쉽다. 왜냐하면 사랑은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없애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행위는 사람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들을 연계시키면서도 유대감을 갖게 한다. 사랑은 위대하지만, 직접 정치화되었을 경우에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유대감과 우정은 정치와 관련될 수 있다. 이런 유대감과 우정은 시민적 유대로서의 ‘세계 사랑’으로 확대된다. 사랑은 일차적으로 윤리적(또는 신학적) 미덕이지 정치적 미덕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는 90년대 이후 민족주의의 다양한 형태 및 인종적 대립, 그리고 탈냉전 시대 종교에 기반을 둔 사회운동의 부상과 더불어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세계사랑’의 의미를 검토하기로 한다.
우정이란 유대가 고대 그리스 시대 시민정치의 근거를 이루고 있었듯이, 우정에 기초한 세계사랑이란 시민적 유대는 현대 정치에서 중요한 기초이다. 세계사랑은 일종의 인류애(love of humanity)이다. 우정은 세계사랑을 위한 실존적 기초이다. 아렌트는 외부세계를 배제하려는 본질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사랑이 일반적으로 비정치적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사랑과 정치적인 것(사랑, 우정, 시민성)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사랑에 대한 관심은 공적이고 인위적인 유대(bond; vinculum)에 대한 모색으로 이어진다. 세계사랑으로 묘사되는 공적 유대는 정치적 우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이, 친밀성을 특징으로 하는 ‘사랑’이란 비정치적 ․ 반정치적 개념을 정치적 개념으로 확장시키려는 시도를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사적 영역과 공공영역의 특징적인 활동 유형을 구별할 수 있고, 양자를 연계시킬 수 있다. 월드컵 경기에서 시민들이 보여주는 ‘나라사랑’이 감정 또는 정서의 차원을 넘어서 정치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정치적 우정으로 전환시키려는 시도는 현실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감정 표현을 통해서 나타나는 사랑이 공적인 대화에 어떻게 확장시킬 것인가를 고려할 때이다. 인맥, 학맥, 지연, 혈연에 기초한 정치를 청산하고 진정으로 정치적 우애와 유대감에 근거한 정치가 필요한 때인 것이다. 더불어 이런 정치적 우정에 근거한 공동체를 과연 부산대 자유게시판이나 토론방에서 만들 수 있을까가 고민되는 시점인 것 같다.
유대(紐帶; solidarity) 란 민주주의 사회에선 중요한 정치적 개념이다. 이 것은 구성원의 공공 지향점을 지정한다. 공공의 지향점이 공동의 권력 방향성을 확립하고, 정부의 지배로 구현된다. 정부는 (가끔 또는 자주) 맹목적 지배 효율성에 근거하여, 제도/조직을 통해 구성원의 모든 삶의 행위(생산,소비)를 국부적 또는 광역적으로 체계화 한다. 제도화 또는 조직화된 이러한 체계는 오랜 시간 사회가 안정화 단계를 거치면 경직하게 되며, 이 때 그 체계를 선점한 구성원과 새로운 구성원간 경험/업무/임금/문화 등의 차이로 공공의 구성원 임에도 그 지향점에 크게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차이는 제도/조직화된 체계 내에서 오랜동안 행위를 주체한 구성원의 권력이 우선 시 됨에 따라 비교적 정형화된 지배/피지배 계급을 형성한다. 공공의 지향점으로 부터 시작된 정형화된 지배/피지배 관계는 그 경직성에 의해, 지배/피지배 계층 모두 본래의 지향점을 상실한 채 살아가게 한다. 단순히, 두 계층은 기계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거나 따르게 된다. 이러한 기계적 권력의 유/출입 근본적으로 공공에 위해를 가하진 않는 개념이다. 하지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철학과 그 것을 구현하는 과학과 이로서 나타나는 문화의 발전에 의해, 체계 내 초기의 구성원이 가지는 철학/과학/문화의 전면 또는 일부 교체가 필요한 시점이 도래하게 되는데 이 때 본래의 기계적 권력 구조로 인해 갈등이 도래하게 된다. 기존의 공공의 지향점이 대체로 인간의 삶을 보장하고 그 존엄성을 해치지 않는 것을 대표한다. 하지만, 체계 내 어쩔 수 없는 갈등이 시작될 때 구성원 각각은 자신에 입장에 근거한 존엄성의 훼손을 경험하게 되며, 이는 공공의 지향점의 분열을 의미한다. 우선 공공의 지향점이 분열이 되면, 각 공동체 내에는 개개의 지향점을 가진 하부 공동체가 형성된다. 민주주의 하에 하부 공동체는 정당 또는 조합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유대의 형성과 새로운 유대의 발견 그리고 유대의 분열에 따른 결과이다. 정당과 조합이 중요한 현대의 민주주의 정치를 대변하는 체계로 본다면, 실제 유대는 정치 체계 확립에 있어 그 씨앗이다.
우리는 각 시절에 따른 유대감의 변화를 인식 한다면, 그에 따른 상이한 유대에 따른 공동체간 (정당 및 조합) 간의 이해는 사실상 제외해야 한다. 그렇다면, 국가 단위 유대가 수 천년 동안 이루어진 현재에 공공을 구성하는 각 개인의 올바른 정치적 행위는 어떻게 수행 되어야 할 까?
1) 각 공동체의 상호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
시간이 흐름에 하나의 유대 따른 공동체가 나타나면, 그 반대되는 개념의 공동체가 나타 날 경우가 크기 때문이다. 하나의 공동체가 사회적 기반을 형성 하고자 할 때 그에 관련한 인적/물적 비용이 크기 때문에 그 것을 반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 각 공동체의 기존의 유대의 방향성이 변질 되지 않도록 한다.
하나의 공동체가 가지는 유대의 지향점이 현 시점에서 전혀 필요 없을 경우는 드물다. 보통 국가 체제의 변화 시 나타나는 현상으로, 국가 내 공동체가 가지는 가치가 소멸된다. 유대의 변질은 사실상 공동체 형성 시 수고에 대한 배신행위이며, 아직 유효한 기존 가치를 폐기하는 이기적인 독단일 경우가 많다.
3) 대화 시 반대가 아닌 합의를 성사 시키고자 해야한다.
상반되는 유대는 어차피 서로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다. 하부 공동체가 상부 공동체 내에 상존 하고자 하면 우선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를 통해 주어진 사항에 대한 상반되는 유대에 대한 서로간 의 합의를 도출하면, 그 것은 해당 사항에 대한 새로운 상호의 유대가 된다. 이로서 동일 상부 공동체 내에서 정치적 우정을 유지 할 수 있으며, 수정된 공공지향점을 제시하는 결과를 제시하고 효과적이고 보다 올바른 권력을 양성한다.
4) 1-3을 위반하는 공동체는 대화의 대상이 아니다.
위의 모든 것을 위반하는 공동체가 있다면, 이는 반대편 공동체가 아닌 그 상위 공동체에 의해 와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와 관련된 공동체 뿐만 아닌 타 공동체간의 정치적 행위를 유심히 보고 상부 공동체 단위로서 내가 행사하는 권력을 통해 위반 공동체를 와해 시켜야 한다. 동일한 수준 사이 상호간의 파괴적 행위는 전쟁이 되지만, 그와 반대의 관계는 혁명 또는 개혁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 비교적 통용되고 덜 파괴적인 개념이 개혁이므로, 이를 달성하기 위한 상부 공동체 단위의 권력 행사에 의한 하부 공동체의 수정이 시도 되어야한다.
반면, 현재 개인 제시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한 최상위 공동체가 타 공동체와 갈등한다면, 내가 제시 할 수 있는 어떠한 정치적 행위가 가능하지 않게 되므로 정칙적 행위로 이행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국가간 전쟁이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타국에 대한 정치적 행위가 불가능하므로 위의 행동양식은 적용 치 않는다.